살면서 생기는 일들은 마치 질문같이 일어난다. 짧게는 일분, 길게는 몇년이 지나고 나서야 삶은 그것에 대답해준다.
비가 막 갠 오전이었다. 하늘은 여전히 구름이 가득 끼어있었다. 기차에서 내려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을 나왔다. 빗물을 머금어 반짝거리는 돌길 위에 여행가방이 덜컹덜컹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간다. 한적한 골목길로 들어서자 아르키로씨의 간판이 보인다. 체크인을 하고 짐을 풀고 바로 산책에 나선다.
흔히 피렌체 두오모라 불리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을 찾는건 어렵지 않다. 그만큼 워낙 작은 동네다. 보통 여기선 <냉정과 열정 사이>의 쥰세이에 빙의되어서 쿠폴라에 오르곤 한다는데 나는 그냥 50센트짜리 양초에 불을 올리고 기도하고 나왔다.
우피치 미술관에 들어가기 위해 긴 줄을 선다. 피렌체에 온 목적이었다. 직원이 두시간을 기다려야한단다. 각오하고 있었기에 편한 마음으로 서서 기다린다. 앞 뒤로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구경한다. 나와 같은 짓을 하고 있던 앞에 선 이탈리아 여자애가 날 돌아보더니 어디서 왔냐 묻는다. 한국이라 말했다. 북쪽이냐 남쪽이냐 묻는다. 남쪽이라 말했다. 이탈리아어를 잘 한다 칭찬 받았지만 내 수준은 딱 거기까지였다. 도록 같은 것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아 미술을 공부하는 학생인 것 같았다. 이름이 엘레나란다. 아직까지 이름을 잘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시네마 천국>에서 토토의 첫사랑과 이름이 같았기 때문이다. 그 엘레나 처럼 금발에 흰 살결을 가진 북구적인 이미지는 아니었지만 발레리아 골리노를 연상시키는 크고 예쁜 눈매를 갖고 있었다. 베로나에서 왔다고 한다. 나중에 알았는데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이 되는 도시였다. 이탈리아어 밑천이 바닥나서 영어를 할 수 있냐 물었다. 잘 못 한단다. 들어보니 내가 이탈리아어 하는 것보다도 못 하는 듯 싶다. 대신 불어와 스페인어를 한단다. 그래서 그 4개국어와 의성어, 바디랭귀지가 섞인 요상한 언어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 아이도 혼자와서 어지간히 심심한 것 같다.
그렇게 두시간은 금방 흘러 우피치에 입장이 되었다. 나는 보티첼리를 좋아했고 그 아이는 카라바조를 좋아했다. 여기서부터 스타일이 극명히 나뉜다. 나는 낭만주의적 천진함과 파스텔톤의 화사함을 동경했다. 그 아이는 사실주의적 냉철함과 현실의 잔혹함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여성성, 그 아이는 남성성을 지향했다. 이런 면에서 서로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한 것 같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앞에서 그 아이가 미술부심을 발휘하여 무언가 열심히 말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파리에서 만나서 오르세에서 쿠르베의 그림을 보고 이야기 했으면 더 재미있을뻔 했단 생각이 든다.
미술관을 나오자마자 레스토랑 홍보 전단을 받는다. 배도 고프고 딱히 아는 곳도 없어 거기가서 같이 식사를 하기로 한다. 토스카나 풍의 스튜 요리와 오일 파스타를 먹는다. 토스카나 지방은 유명한 올리브 산지란다. 아담하고 저렴한 레스토랑이지만 제법 전망이 좋다. 낮은 건물들 사이로 두오모와 죠토의 종탑이 보이는 것이 헬레나 본햄 카터가 나온 <전망 좋은 방>에서 봤던 풍광이 스쳐간다.
아르노 강변을 따라 걸으며 베키오 다리로 향한다. 베키오 다리는 다리 양쪽에 알록달록한 건물이 올려져 마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에서 묘사된 중세 교각과 같은 모습을 띄고 있다. 그래도 다리 중간에는 아치형으로 트여있어 양쪽으로 강을 볼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다. 거기에서 젤라또를 파는 아저씨가 있길래 그 아이는 티라미수 맛, 나는 포르마지오 맛으로 사서 난간에 기대어 같이 젤라또를 먹는다. 그 아이가 티라미수는 “나를 들어올리다”라는 뜻을 갖고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포르마지오는 “치즈”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했다. 이런 시시한 농담에 서로 웃는다. 코 끝에 젤라또가 묻은 모습에 또 웃는다. 아까 식사하면서 내가 이탈리아어 가사를 아는 유일한 노래가 오솔레미오라고 했는데 그걸 부르기 시작하길래 같이 따라 불렀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우릴 보고 웃으며 걸어간다.
서로 장난을 치다가 다리를 건너니 바로 피티궁전이 나온다. 궁전 앞 광장에서 마침 무슨 행사를 하는지 중세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깃발을 들고 행진을 하다가 곡예를 하고 그런다. 맞은편에는 천막으로 만든 부스가 차려져있고 무슨 와인을 홍보하면서 무료 시음행사를 한다. 플라스틱 와인잔에 공짜 와인을 받고 “살루테”하며 건배를 하고 눈을 찡긋한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시음을 하려고 와서 조금씩만 나눠주기 때문에 술이 매우 약한 나마저도 얼굴이 빨개지기는 힘든 양이다.
버스를 타고 미켈란젤로 언덕에 올라 저녁놀을 바라보며 살짝 상념에 잠긴다. 피렌체 전경을 배경으로 서로 사진을 찍어주다보니 해가 저문다. 헤어지면서 그 아이가 혹시 베로나에 오게되면 연락하라면서 내 수첩에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어준다. 알겠다곤 하지만 아마 그럴 일 없을 거라 생각한다. 그때는 페이스북이 없던 시대다.
다음날 아침 나는 베네치아로 떠났고, 거기에서 당일 관광 후 밤에 야간열차를 타고 뮌헨으로 넘어가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그날 하필 철도 파업이 있어서 국경을 넘는 야간열차는 모두 취소되었고 24시간 동안은 이탈리아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베네치아 역에서 밤을 새다가 아까운 시간에 다른 곳이라도 봐야겠다 싶어 새벽에 예정에도 없던 밀라노로 떠났다. 막상 도착한 밀라노는 불쾌한 느낌으로 가득했다. 사람들의 인상도 좋지 않게 느껴졌다. 밀라노 두오모 광장에서는 두오모와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의 그 웅장함에 경외감보다는 두려움이 느껴졌다. 급기야 어떤 거지같은 놈이 갑자기 내 동의도 구하지 않고 내 팔에 비둘기 모이를 뿌리고는 그 끔찍하고 더러운 비둘기들을 내 팔 위에 모이게 하고는 그걸로 돈을 받아가려고 하길래 미친듯이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고는 밀라노를 벗어났다. 그리고는 다시 기차를 타고 나도 모르게 잘 알지도 못 하는 베로나로 무작정 가버렸다.
베로나에서 뮌헨으로 가는 야간열차 티켓을 다시 끊고 엘레나에게 전화를 한다. 2007년 당시엔 유럽이 우리나라와 다른 통신규격을 사용하여 자동 로밍이 불가능해서 따로 휴대폰을 마련해야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나는 혹시나 몰라서 모토롤라 레이저2 유럽판을 준비해 갔었다. 그랬던 것이 마침내 도움이 되는 순간이다. 그 착한 아이가 전화를 받고 역으로 나와주었다. 무슨 상황인지 설명하긴 어려웠다. 파업 때문이라고 strike 스트라이크 스뜨라이끄 각종 발음으로 말해줬지만 잘 못 알아듣는 것 같다. 나중에 지가 역 전광판에 적힌걸 보고 나서야 이해한다. 그렇게 또 이런 저런 이야기를 시작하며 화창한 베로나 거리를 걷는다. 그 아이는 고맙게도 심심했을 법한 나와 그렇게 또 하루를 있어주었다. 저녁에 역사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같이 햄버거를 먹는데 이제 야간열차를 타고 어디로 떠나냐 묻는다. 무니치(뮌헨)로 간다고 했다. 옥토버페스트에 가냐 묻길래 그렇다고 했다. 빅맥을 씹다가 갑자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길었던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이 서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아쉽고 슬퍼지기도 해서 나도 모르게 펑펑 울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눈물 젖은 햄버거를 먹는 순간이었다. 내가 우는걸 보더니 그 아이가 뭐라뭐라 말한다. 못 알아들으니까 불어로도 하고 스페인어로도 하는데 여전히 내가 못 알아듣는 수준이다. 영어로 말해달라니까 난감해 하면서 억지로 말하는데 너무 엉망이라 해독 불가다. 그러더니 지도 답답해서 내 수첩에다가 그 이탈리아어 글귀를 쓴다. 나중에 찾아보란다. 지금 같으면 스마트폰이 있어서 바로 찾아서 알아들었겠지만 그 때는 아이팟터치는 커녕 역사 내 공용 Wi-Fi 마저 없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작별인사를 하고 뮌헨에 넘어가서는 울적한 채로 새로 만난 사람들과 잘 적응도 못하고 계속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맥주나 마시고 뻗어버렸다.
그 아이의 쪽지를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5년이나 지나서이다. 이탈리아에 여행가는 친구에게 이탈리아 이야기를 해주고 나서 당시 여행할 때 썼던 수첩이 급 생각나서 꺼냈다가 이 글귀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여행 직후 군대에 간 탓에 5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 아이의 추억을 잊고 지내고 있었다. 문득 그 아이가 써준 글귀가 다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구글 덕분에 그제서야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Accadono cose che sono come domande. Passa un minuto, oppure anni, e poi la vita risponde.
(살면서 생기는 일들은 마치 질문같이 일어난다. 짧게는 일분, 길게는 몇년이 지나고 나서야 삶은 그것에 대답해준다.)
그 때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어도 진정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언어적으로도, 심정적으로도 가슴에 와닿고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길 때나, 인생의 전환점에서 큰 결심이 필요할 때, 특히 이 말은 내 마음 속 소리를 주저않고 따라갈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었다. 그 아이는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이름 외에 성도 모르기에 페이스북으로 찾을 수도 말을 전할 수도 없지만 언젠간 인연이 다시 닿는다면 꼭 말해주고 싶다. “그라치에 밀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