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12일 여행기) 유럽을 여행하다보면 누구나 “아, 이곳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하는 철없는 생각을 한번쯤은 해볼 것이다. 철없는 생각이라 한 이유는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다보면 결국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치게 되기 때문이다. 여행하면서 어떤 도시가 아무리 너무 마음에 들고 멋지게 보인다 할지라도, 며칠 여행하는 것과 몇 년간 사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하지만 이런 철없는 생각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게 만드는 곳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할슈타트(Hallstatt)다. 먼 훗날 이 마을에서 노후를 보낼 수만 있다면 그보다 멋진 여생은 없을 것만 같다. 이는 나뿐만 아니라 할슈타트에서 하루를 묵어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하는 생각일 것이다. 정말 이곳은 한번 들르면 하루 묵고 싶게 만들고, 하루 묵으면 이틀을 묵고 싶게 만드는 그런 매력을 갖고 있는 마을이다.
할슈타트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Salzburg)와 빈(Wien) 사이의 호수 지역인, 잘츠캄머구트(Salzkammergut)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마을이다. 불과 몇 년 전 일본과 우리나라에 드라마와 CF를 통해 크게 알려져 상당한 수의 관광객들이 매년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특히 오스트리아를 여행한다면 꼭 들르는 도시인 잘츠부르크와 빈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두 도시를 모두 방문할 계획이라면 지리상으로도 찾아가기 용이한 탓도 있을 것이다.
할슈타트에 찾아가기 위해서는, 보통 잘츠부르크에서 포스트버스 150번을 타고 바트 이슐(Bad Ischl)로 간 다음, 기차로 갈아타서 할슈타트 역까지 간다. 바트 이슐의 바트(Bad)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뭐가 나쁘다는 건가?”하고 생각하는데, 독일어의 Bad는 영어의 Bath에 해당하는 말로 보통 독일어권 지역에 이 단어가 붙어있으면 온천지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버스와 기차를 타고 잘츠캄머구트 지역을 지나는 풍경은 너무나도 아름답다. 도로와 기찻길이 호수를 끼고 나있어, 창가 자리에 앉아 차창 밖을 바라보다보면 호수와 산이 자아내는 그 멋진 장관에 감탄을 금치 못 하게 된다.
아기자기한 시골 간이역 같은 할슈타트 역에 내리면 호수 위의 선착장으로 곧바로 이어진 길을 따라 내려가게 된다. 선착장에는 열차시간에 맞춰 통통배 한 척이 대기하고 있다. 여행객들이 모두 승선하면 배는 할슈태터 호수(Hallstättersee)를 가로질러 할슈타트 마을로 향한다. 배가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호수너머 안개 속에 희미하게 보였던 마을의 모습은 점점 선명해진다. 호수 위에 떠있는 이 예쁜 마을은 구름 사이로 비추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수면 위로 제 모습을 반사시켜 한 폭의 데칼코마니를 그려낸다.
배가 마을에 다다르고 나는 우선 예약한 숙소로 가서 짐을 푼다. 1층에서는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그 위로 여관을 운영하고 있는, 할슈타트에서 꽤 유명한 숙소다. 싱글 룸은 비싼 값에 비해 상당히 좁았지만 침대도 상당히 폭신하고 화장실도 있고, 있을 건 다 있다. 무엇보다 가장 맘에 든 것은 테라스다. 바로 호숫가에 위치하고 있어서, 테라스로 나가보면 잘츠캄머구트의 에메랄드빛 호수가 눈앞에 펼쳐지는데 그 장관이 너무 가까워 그 호수 전체를 내가 점유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서둘러서 레이크뷰 룸으로 예약한 보람이 있었다. 할슈타트의 숙소들은 대부분 개인이 운영하는 여관이나 민박이고, 체계적인 예약시스템을 갖추지 못 했기 때문에, 보통 이메일을 통해 예약을 한다. 대부분 영어를 읽을 줄 알기 때문에, 독일어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방이 많지 않아 성수기엔 방이 금방 차니 두세 달 전에 미리미리 예약하는 것이 좋다. 할슈타트에 같이 여행 온 친구와 이 숙소 1층 레스토랑에서 같이 식사도 했는데 맛도 꽤 괜찮았다.
할슈타트에서는 딱히 가이드북이나 지도가 필요하지 않다. 그만큼 굉장히 작고 단순한 마을이다. 물론 여행인포메이션 센터가 마을 중심에 있으니 먼저 이곳에서 간단한 정보를 얻는 것이 좋다. 마을을 간단히 산책하는 데에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구석구석 골목골목 예쁜 풍경들을 담고 있다.
마을 뒤에는 커다란 산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 마을의 명물인 할슈타트 소금광산이다. 옛날 소금이 귀했던 시대에는 이 마을의 주요 수입원이 이 광산에서 나는 암염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이곳에서 더 이상 암염을 캐지 않고 투어 코스를 만들어 관광 자원으로서 수익을 얻고 있다. 광산 투어를 하기 위해서는 산 위로 올라가야하는데,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고, 직접 트래킹을 하는 방법이 있다.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10분이면 광산 입구까지 올라갈 수 있고, 직접 올라가면 한 시간정도 등산을 해야 한다. 튼튼한 두 다리를 갖고 있는 건장한 20대 사내인 우리들은 돈도 아끼고 경치도 완상할 겸 직접 산을 타기로 하고 오솔길을 걸어 올라갔다. 길이 완만한 경사로 지그재그로 나있어서 거리는 꽤 길었지만 그다지 힘들진 않았다. 한 시간의 등반 끝에 광산 투어 매표소에 도착해서 표를 사니 직원이 케이블카 표를 보여 달라고 한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면 광산 투어가 약간 할인이 된다. 우리는 직접 걸어 올라왔다고 하니까 이 직원이 놀란 말투로 “원 아워??”라며 마치 별 미친놈들을 다 보겠다는듯한 표정을 한다. 우리가 멋쩍은 듯 웃으니 그 직원은 금세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투어로 안내했다.
광산 투어로 시작하기 전, 관람객들은 광부복을 지급받는다. 입고 있는 옷 위로 광부복을 입으면 된다. 투어를 하면서 광산 슬라이드를 두 번 정도 타게 되는데, 그것을 탈 때 관람객들의 옷을 마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입히는 것 같다. 투어는 광산 내부에 정해진 코스를 가이드가 안내하면서 진행되는데, 독일어로 한번, 영어로 한번 설명을 해준다. 방금 이야기한 슬라이드를 비롯하여 갖가지 어트랙션들로 이루어져 있어 꽤 알찬 프로그램이다. 투어 마지막에는 진짜 광부 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작은 광산열차를 타고 광산 밖으로 나오게 된다. 투어가 끝나면 잘츠캄머구트에서 캐낸 소금을 기념품으로 제공하고, 마치 놀이동산의 롤러코스터처럼 슬라이드를 타고 내려오는 순간을 카메라로 찍어 원하는 사람에게 판매를 하기도 한다.
광산에서 다시 오솔길을 따라 걸어 내려오면 마을 중심 광장에 도착하게 된다. 마치 동화 속 마을을 영화로 재현하기 위해 세트를 꾸며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광장 바로 근처에는 교회가 있는데, 할슈타트 마을만큼이나 소박하고 아기자기하면서 고요하기 때문에 아직 남은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마음을 편안히 가라앉히기 제격이다.
빈으로 먼저 떠나는 친구를 보내고 혼자 해질녘의 할슈타트 가을 거리를 산책하면서 느낀 고즈넉한 분위기, 길 곳곳마다 자리하고 있었던 성스러운 조각상과 그 위에 놓인 신선한 장미꽃들, 살짝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보였던 어떤 목수가 열심히 나무 탁자를 만들고 있던 모습, 다음날 갓 구워진 빵 냄새와 함께 “Guten Morgen!”이라며 아침식사를 내온 여관 여주인의 온화한 미소, 이 모두가 이제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할슈타트를 더없이 아름다운 마을로만 만든다. 할 수만 있다면 어느 누가 이런 마을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