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4일 여행기) 영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인가? 중절모 쓴 신사, 빅벤, 비 내리는 흐린 하늘, 여왕, 그리고 축구. 많은 것들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대부분은 영국 중에서도 런던에 관련된 대상일 것이다. 런던을 두 번째 여행하면서 충분히 둘러보았다고 느꼈을 때, 런던과는 또 다른 영국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런 맥락에서, 런던 근교에 당일치기로 갔다올만한 도시들 중에서 가장 흥미를 끌었던 곳은 로마 시대의 유적이 남아있는 바쓰(Bath)와 스톤헨지(Stonehenge)가 있는 솔즈베리(Salisbury)였다. 두 도시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기 때문에 부지런하게 돌아다니면 당일치기로 두 곳 모두 여행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런던에서 바쓰 또는 솔즈베리로 가려면 기차나 버스를 이용하는데, 버스에 비해 기차가 비싸긴 해도 시간이 절반은 적게 걸리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지 않다면 기차를 타는 것이 좋다. 기차표는 인터넷으로 미리 예매를 해두면 왕복 10파운드 내외의 비교적 싼 가격으로 갔다 올 수 있다. 런던에서 바쓰나 솔즈베리까지는 기차로 둘 다 1시간 30분정도 걸리고, 바쓰와 솔즈베리 사이는 기차로 1시간 정도 걸린다. 만약 영국 여행 중 에든버러를 계획하고 있다면 애초에 영국 철도 패스인 “브리트레일(BritRail) 패스”를 미리 구매해두는 것이 매우 경제적이다. 런던과 에든버러 사이의 편도 기차 요금만 쳐도 이미 본전을 뽑고, 패스 기간 동안 영국 내의 아무 열차나 무료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런던에서 기차로 바쓰에 간다면 패딩턴 역(Paddington Station)에서 출발하는 열차를 타야한다. 솔즈베리에 간다면 워털루 역(Waterloo Station)에서 열차를 탄다. 원래 계획은 솔즈베리에 가서 스톤헨지를 보고 그 다음 바쓰로 가는 것이었으나 무슨 이유였는지 그 날은 런던에서 솔즈베리로 바로 연결되는 열차편이 없었다. 이상해서 역무원에게 물어보니 경유편이 있긴 한데 3시간이 넘게 걸린다며 자기 같으면 그렇게 해서까지 가진 않겠단다. 그래서 바쓰를 먼저 보기로 계획을 바꾸고 패딩턴 역에서 바쓰 행 열차를 탔다. 당일치기로 두 도시를 볼 계획이었기에 아침 일찍부터 여행을 시작하려 했지만 열차편 문제로 알아보느라 바쓰에 계획보다 늦게 도착해버렸다. 하지만 바쓰는 꽤 작은 규모의 도시였기에 짧은 시간 안에 둘러보기에 충분했다.
바쓰의 중앙역인 바쓰 스파 역(Bath Spa Station)에 도착하여 역 앞에 곧게 나있는 거리를 따라 쭉 올라가다보면 웅장한 바쓰 사원(Bath Abbey)과 로만 바쓰(Roman Baths)가 위치한 광장에 들어서게 된다. 로마시대의 석조 건물 풍으로 장식된 건물이 바로 로마의 목욕탕이었던 로만 바쓰다. 지금은 실제로 목욕은 할 수 없고 로마시대 목욕문화를 보여주는 박물관이 되어있다. 바쓰라는 지명에서부터 알 수 있듯, 바쓰는 애초에 온천으로 인해 목욕탕이 생겨나면서 발전한 도시다. 영어에서 목욕을 뜻하는 말인 bath가 이 지명과 어원을 같이하고 있다. 일찍이 목욕탕 문화가 발전했던 로마인들이 영국 지배하면서 이 지역을 보고 가만히 놔두었을 리가 만무하다. 그렇게 로만 바쓰는 엄청난 규모로 지어졌다.
로만 바쓰 박물관은 꽤 다채롭게 프로그램이 짜여있다. 입장 요금은 12파운드(학생 10.5파운드)로 많이 비싼 편이지만 오디오 가이드(한국어 미지원)가 무료로 제공된다. 중앙에 거대하게 위치한 대목욕탕을 주변으로 돌면서 다른 시설들을 구경하게 되는데 바닥에 깔려있는 돌 하나까지도 로마의 것 그대로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대목욕탕 주변의 다른 방들에도 크고 작은 냉온탕들이 있고, 정원과 산책로, 탈의실, 기도실 등을 모두 갖추고 있어 요즘의 최고급 목욕탕 못지않은 모습으로 감탄하게 만든다. 다른 전시실에서는 로마시대를 재현해 놓은 미니어처와 유적에서 발굴된 조각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내에는 로마시대를 콘셉트로 한 펌프 룸(Pump Room)이라는 고급 레스토랑이 있는데 식사 외에도 별도의 비용을 내면 여러 가지 미네랄이 들어있는 온천수를 마셔볼 수 있다.
이 날이 일요일이라서 그랬는지 바쓰는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로만 바쓰를 관람하고 나오니 광장 앞은 사람이 더 많아져있었다. 광장 한편에는 거리의 악사들이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고 있어 한층 더 활발한 분위기를 더했다.
이번에는 아까 지나쳤던 바쓰 사원으로 들어갔다. 바로 앞에서 보니 더욱 웅장함이 느껴졌다. 외벽은 수많은 조각 장식들로 수놓아져 있어 영국 중세풍 특유의 모습이 나타난 사원이었다. 입구에 들어가니 예쁜 영국 아가씨가 미소 지으며 반긴다. 친절하게 설명하며 이것저것 사원에 관한 책자들을 주고서는, 사원 관람은 공짜지만 원한다면 약간의 기부금을 낼 수 있다고 말한다. 즉시 1파운드짜리 동전을 꺼내서 내니 그 아가씨가 고맙다며 활짝 웃는다. 미소로 답하고 사원 내부에 들어가니 전면에는 화려하게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가 펼쳐진다. 이 스테인드글라스는 56장으로 예수의 일생을 그림으로 담고 있다고 한다. 예배당의 천장은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정교한 장식들로 꾸며져 있었다.
사원을 나와 뒤편의 에이븐(Avon) 강변으로 나오면 다리 하나가 보인다. 일반적인 다리의 모습이 아니라 다리 위에 건물이 지어진 모양으로 마치 이탈리아 피렌체의 베키오 다리를 연상시킨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를 읽었다면 어떤 구조의 다리인지 쉽게 떠오를 것이다. 바쓰의 명물중 하나인 이 펄트니 다리(Pulteney Bridge)는 영국 건축물 특유의 분위기가 반영되어서인지 베키오 다리처럼 화사하고 아기자기한 분위기 대신 칙칙하고 수수한 느낌을 준다. 예전에는 다리 위에 상점들이 들어선 이런 구조의 다리가 많았다고 한다.
다시 바쓰 번화가로 들어서서 오르막을 따라 올라갔다. 바쓰는 오랜 관광도시라 그런지 거리 곳곳에 조경이 잘 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골목골목도 깨끗하고 어디에서나 활짝 핀 꽃들을 찾아볼 수 있다. 올라가는 길에도 크고 작은 영국식 정원과 공원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런던에서도 느꼈지만 유럽은 대체로 공원문화가 잘 발달해 있고 풀밭에 앉아 쉬거나 낮잠을 자는 사람들이 많다.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면서 국내에서 너무 바쁘게 앞만 보고 걸어온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바쓰의 일요일 오후는 너무나도 평화롭다.
번화가 위로 나있는 오르막길을 올라가다보면 중간에 제인 오스틴 센터(Jane Austen Centre)를 지나게 된다. <오만과 편견>, <센스 앤 센서빌리티> 등의 작품을 남긴 영국의 가장 위대한 여류 소설가, 그 제인 오스틴 맞다. 바쓰는 그녀가 태어난 고향이자 가장 사랑했던 곳이라고 한다. 그녀를 기념하는 박물관이다 보니 이곳은 빅토리아 시대 콘셉트로 꾸며졌다. 입구에는 빅토리아 시대의 신사처럼 차려입은 직원이 안내를 하고 있고 내부에는 그녀에 관한 그 시대의 물건들로 가득하다. 제인 오스틴 소설의 열렬한 팬이라면 꼭 들려보면 좋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로열 크레센트(Royal Crescent)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거대한 초승달 형태로 되어있는 긴 건물인데 앞에서 보면 그 압도적인 규모에 카메라로 한 번에 담기도 힘들다. 18세기 영국 고급 건축물 양식을 그대로 따른 형태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당시에는 상류층의 저택으로 지어졌으나 현재는 박물관과 고급 호텔로 쓰이고 있다. 무엇보다 건물 앞에 드넓은 녹지가 조성되어있어서 이때 같은 일요일 오후에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축구를 하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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